귀한 시간

from 이야기 2020. 4. 14. 23:37

네 가족이 되고 나니 생각했던대로 바쁘다. 오늘은 10시에 모든 가족을 재우고 혼자가 되었다. 갑자기 찾아온 여유에 허둥지둥하며 뭘할까 생각하다가, 수많은 리스트 중 갑자기 여기 공간이 생각났다.

 

특히나 재택근무를 하는 상황에서 갓 네 명이 된 가정의 아빠로 사는 것에는 장점과 단점이 있는데,

 

장점은 - 소소한 집안 일들과 육아에 참여가 가능하다. 집에 있으니 일을 하다가도 아기 기저귀를 갈아준다거나, 잠깐 나가서 쓰레기를 버린다거나, 첫째 데리고 점심시간을 이용해 외출을 한다거나. 와이프 입장에서는 이런 손 거들기가 적지 않은 역할일 것이다.

 

단점은 - 내가 가진 모든 시간이 공동체 생활을 위한 시간으로 이용된다는 것이다. 아침 10시부터는 회사공동체를 위해, 오후 7시부터는 가족공동체를 위해, 그리고 다음날 아침 10시부터는 다시 회사공동체를 위해. 바위 틈 같은 1시간 가량의 출퇴근 시간까지 모두 공동체를 위해 바친다. 뭐 사실 그러다가도 오늘 같은 밤이 있고 그렇다.

 

아무튼 투두리스트 메모지 없이 이런 시간을 마주하면 온갖게 떠오르는데, 책읽기(종이책)-책읽기(리디북스)-영화보기-글쓰기(육아)-글쓰기(전문분야)-블로그글읽기-못들은수업듣기-온라인강좌아이쇼핑하기-계획세워보기-등등을 스쳐지나가고 결국 스마트폰 두어시간 하다가 잠든다.

 

오늘은 그나마 생산적인 시간을 보내는 듯. (근데 떠오르는걸 써놓고 보니 참 재미없다 나도 ㅋ)

 

이왕 쓴 김에 정말 두서없이 생각했던 몇 가지를 써보자. 각각의 문장은 어디 다른 공간에서 한 편의 글이 될수도 아닐수도 있다. 정말 막 뱉어보는, 퇴고 없는 생각이다.

 

1. 나이를 한 살 더 먹고 나니, 금전적인 자산과 비금전적인 자산 모두가 중요하고 의미있다는 점을 더 깨닫게 되었다. 생각하는 관심사, 주변의 관계, 가족의 행복, 자유의지로 활용할 수 있는 시간이 자산이다. 인생의 자산 총량이 더 크게 느껴진다. 이제 알게 되었는데, 앞으로 이게 체화될 수 있도록 생각과 상황이 변하지 않으면 좋겠다. 그리고 내 자식들은 이것의 의미를 나보다 더 빨리 알면 좋겠다.

 

2. 주식을 시작한지 6개월 정도 되니 이제야 앱 안열고 까먹는 날이 생긴다. 그리고 차트분석보다는 역시 가치투자가 옳다(적어도 나에게는). 

 

3. 어떤 보상도 기대하지 않고 그저 재밌어서 했던 수많은 일들, 그 때의 초심을 유지하는 것은 어렵다. 왜냐면 어떤 보상을 얻어본 적이 있고, 어떤 보상을 얻게 되는지 곁에서 바깥에서 간접 경험이 가능하기에, 어떤 보상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새로운 시도를 하기도 하고 재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무언가를 꾸준히 한다는 것이 참 어렵다. 상념들을 배제하고 초심에 집중해야하기 때문이다. 혹은 주어지는 보상보다 그 자체가 더 즐거울 때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4. 작은 기업을 벗어나 대기업을 다닌지 3년을 넘겼다. 3년 간 서로 다른 세 개의 기업에 다녔는데, 돌이켜보면 이제야 체화되어 변화된 여러가지 것들이 있다.

 

첫째, 분석의 프레임으로 '공간적 기준'을 벗겨내는데 2년이 넘게 걸린듯 하다. 첫 회사를 떠나 새로운 회사에서 새로운 도메인에 대해 새로운 분석주제를 들고도 꽤 오랫동안 '위치정보'부터 생각하는 습관을 버리지 못했는데, 이제야 그렇지 않음을 느낀다. 다른 많은 것들을 '기준'으로 세워가며 사고할 수 있게 되었다.

 

둘째, 여럿이서 일할 때 낼 수 있는 성과를 체험하고 있다. 데이터 분석은 생각보다 여럿이서 하기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깊이 있는 과제는 여럿이 해야 할 수 있다. 다뤄야할 범위가 넓어도 그렇다. 내 손과 내 머리 범위를 벗어나서 협력하여 일하는 방법을 이제야 익히고 있다. 이는 커다란 시스템을 운영하면서 동시에 기민한 결과를 낼 수 있는 기동력 간의 참으로 좁은 교집합을 찾아내는 능력의 배양을 의미하기도 한다. 작은 성과를 빠르게 내는 것은 실력있는 누구나 가능할지 모른다. 하지만 서로서로 물려있는 시스템 간 상호작용을 이해하고 같이 움직이면서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은 그 다음 전문성 레이어에 필요한 것이다.

 

셋째, 커리어 초반의 기쁨은 되찾을 수 없겠지만, 현재의 부담감과 지루함과 새로운 성취감도 당연함을 받아들인다. (너무 많은 것들을 깎아내리고 일반화한 비유임을 인정하고) 내가 스타트업에서 경험한 기쁨은 햇살 가득한 좁은 운동장에서의 동네축구와 같다고 느낀다. 얼마나 재미있었겠는가? 현재는 프로축구단에서 정식으로 축구를 한다. 지켜야할 복잡한 룰, 수많은 동료와의 관계, 반복되는 경기. 어릴 적 동네축구의 기쁨은 없다. 하지만 프로의 세계가 주는 또다른 기쁨이 있다면, '축구하는 맛을 느끼게 하는' 프로들의 존재다. 성인이 되어서 어릴적 그 기분을 다시 느낄 수 없듯이, 레알 마드리드에서 뛰는 선수들이 느끼는 희열을 대체할 수 있는 다른 경험은 없다. 뒤로가기 없이 더 나은 프로의 세계, 리그, 구단으로의 전진을 꿈꿀 뿐이다.

 

5. 기생충 감독 봉준호는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는 글귀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한다. 다른 모든 개인에게도 통용되는 이야기임을 새삼 느낀다. 소셜이 발달하고 나서 모든 개인의 성과를 보편적인 것처럼 받아들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그러다보니 내가 처한 이 환경이 아이러니하게도 보편적인 상황과 멀어져보이는 이상한 효과가 생긴다. 그래서 내가 겪는 문제를 약간 뒤에 두고, 더 보편적인 문제에 대해 해결책을 찾고 방법을 갖추는 식으로 무언가를 좇는 것이 나아보인다는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 하지만 이와 반대로 생각하는 것이 '옳다'라는 생각을 다시 하는 요즘이다.

 

6. 나는 무엇을 좇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이름과 외연도 중요하고, 누가 뭐라든 나 스스로 충만함도 중요하다. 어느 쪽이 내게 더 큰 보상을 줄까? 아니면 무엇을 얻었을 때 나는 보상이라고 느끼나? 그저 솔직하지 못한 측면도 많겠지 ㅎㅎ

 

7. 더 생각나는 것은 없는데, 다음에 또 쏟아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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