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축

새음반을 들으면서

Carmel 2014. 10. 22. 21:15

이번에 발매된 서태지의 9집을 무한반복해서 듣고 있다. 옛날말로 하자면 스마트폰 '늘어지게' 듣고 있다. 사실 8집 앨범에서 조금은 실망을 해서,서태지도 여기까지구나 하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이번 앨범은 반전과 같다.

이전 앨범보다 훨씬 나이든 티가 나는 9집을 들으면서, 서태지는 언제부터 나에게 영웅과 같은 대접을 받고 있나 생각해보게된다. 그리고 난 왜 그를 영웅 대접을 하고 있는가 되물어본다.

굉장한 폭을 뛰어넘는 이야기가 되겠지만,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사람은 왜 사는가, 나는 왜 사는가 하는 막연한 질문을 던지고 얕은 대답을 해보았다. 이 질문이 시작된 이유는, 나는 서태지가 더이상 음악을 만들어내지 않는 순간이 되면 무척이나 그리울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내 인생에서 그러한 감동을 준 것은 서태지 뿐만은 아니고, 글과 영화도 있다.

살면서 행복한 때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크나큰 두가지를 꼽자면, 스스로를 뿌듯해지는 무언가를 만들때와, 누군가의 집요함으로 만들어진 '완성된' 작품을 접할 때이다.

굉장한 것을 만드는 이의 입장에서는 무언가를 창조하는 것은 자신을 증명하는 가장 직설적이고 확실한 방법이다. 사람들은 상대에게 존재를 증명하길 요구하며, 확고하게 증명하는 결과물을 볼때 기쁨을 느낀다. 우리가 일상에서 간혹 마주치는,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음식, 우두커니 생각에 잠기게하는 음악과 글, 한참을 바라보게 만드는 건축물을 경외하는 것은, 그 너머에 그것을 만들어내는 이에 대한 감사함이구나 하는 아주 작은 깨달음을 생각해보았다.

이렇게 창조를 통해 존재를 증명하는 사람은 자유롭다. 경지에 이른 사람들은 다른 구차한 방식으로 본인의 존재를 항변할 경로가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이미 그 증명이라는 것은 세상을 향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자유를 얻고 싶다.

너무나 지루할 수 있고, 스스로를 주변적인 것으로 치부할 수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안은 모든 상황을 창조하는 행위로 전환하는 것이다. 만들어낸다는 것은 글과 음악, 미술에 절대 국한되지 않는다. 누적된 관찰에서의 발견과 정성들인 관계 속에서 써내려가는 편지 역시 창조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IDEO 파트너인 디에구 로드리게스 대체 왜 '영국의 권리장전'이 역사상 최고의 '디자인'이라고 평하는지 이해할 수 있기도 하다. 너무 광범위한 해석이 아닌가 의구심을 가졌었지만 이제는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